둘 이상의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면 원문을 영어로

번역은 대부분 영어가 ‘원문의 언어’

기술 문서의 번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가지 언어만이 한국어에서 직접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영어,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가 이에 해당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안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번역사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이 세 가지에 국한되어 있다. 한국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겠으나 그것은 여전히 요행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번역 회사들은 사업을 요행에 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제휴할 수 있는  번역 회사나 번역사들을 러시아에서 찾는다.  물론 한국어에서 바로 러시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러시아에도 없다고 봐야 한다. 영어는 실제 만국 공통어이고, 번역 업계에서 대부분 영어가 원문의 언어라고 간주한다.

번역비는 번역사가 속한 국가의 임금 수준을 따른다. 일본어로 번역해야 하는 프로젝트에서, 낮은 비용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한국어로 원문을 작성해야 한다.  그 프로젝트를 맡게 된 번역 회사는 당연히 일본보다 번역료가 싼 한국에서 번역사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질이 중요하다면 영어로 원문을 작성해야 한다. 두 나라 모두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하는 번역사의 수보다 일본에서 영어를 하는 번역사의 수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더 많은 번역사가 더 좋은 번역을 결정적으로 담보할 수 없을지라도 그 개연성은 매우 높아진다. 적절한 번역사를 구하기 어렵더라도 수주를 포기하는 번역 회사는 없다. 그들은 고객이 까다롭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격 없는—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햇병아리 번역사에게—일을 맡길지도 모른다.

검증된 번역사일지라도 항상 좋은 결과를 내놓기 어렵다. 내용의 어려움—특히 접해본 적이 없는 분야라면, 일정, 건강 상태 등 번역 품질에 영향을 미칠 만한 요인들은 많다. 번역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많은 번역 회사들이 번역 검사를 전담하는 사람들을 두고 있다. 대부분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나 교포들이다. 일본어 전담자를 둔 번역 회사들은 드물다. 그런 전담자를 채용해야 할 만큼 물량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사정이 원문을 영어로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문서가 다른 이에 의해 적절하게 번역되었는지 검토되었기를 기대하기 어려우나, 일본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는 경우라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의뢰자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일한 테크니컬 라이터가 작성하고 동일한 번역사가 작업할지라도—두 사람 모두 훌륭하다면, 영어본에서 번역한 경우에 영어본과 한국어본 모두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좋기 마련이다.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기술 문서를 주로 다루는 번역사들에게 동일한 분야의 문서를 다루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고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깊이 축적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내용에 따라 번역사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 영상물 번역
  • 출판물 (단행본) 번역
  • 기술 문서 번역

영상물은, 의학 드라마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 내용에 대해 그다지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상물 번역사는 전문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읽히거나 들리도록 옮기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I know what I’m doing”을 “난 바보가 아냐” 따위로 옮기는 것이 한 예이다. 출판물 번역사에게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이 기대된다. 다행히 이 기대가 대체로 충족되는 것 같다. 출판물 번역사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그리고 좋아하는 것만을 골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대개 한 가지 분야의 서적들만을 다룬다. 경제학 책들을 번역하면서 생물학 책들도 번역하는 번역사들은 없다. 이에 반해 기술 문서 번역사들은 일에서 자기의 취향과 선호를 고집할 수 없다. 어제는 태블릿 앱의 문서를, 오늘은 담수화 장치의 것을 번역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쓰이는 중요한 개념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에 번역사들에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출판물 번역사들이 하는 것처럼 특정 분야의 일만을 골라 하는 것은 기술 번역사들뿐만 아니라 테크니컬 라이터들에게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테크니컬 라이터들은 전문 분야의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번역사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갖는다. 의뢰자들이 자신들의 제품에 쓰인 기술들을 테크니컬 라이터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듦을 깨달으면 그들은 둘째 일을 같은 테크니컬 라이터가 맡기를 원한다. 아무도 자신들의 엔지니어들이 새로운 테크니컬 라이터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적 특성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데에 있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훨씬 더 많은 어휘와 표현 장치들을 갖고 있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정밀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 등가 번역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고, 그 영어 문장을 다시 한국어로 바꿀 때, 원래 한국어 문장과 동일하게—아니면 적어도 유사하게 번역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영어에서 한국어로의 번역은 대개 내용의 복잡도를 떨어뜨린다. 원문이 충분히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 번역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손실은 미미해서 번역문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자면 한국어에 없는 요소들, 특히 관사를 추가해야 한다. 영어 문장에서 엄밀함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요소들을 한국어 문장에서 나타내면 대분분의 사람들이—문맥에 의지하여 해석하려는, 영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성향 때문에—그것을 불필요하게 장황하다고 느낀다. 이러한 습성 때문에 테크니컬 라이터는 할 수 있는 것보다 덜 치밀하게 문서를 작성한다. 그래서 영어로 작성했더라면 달성되었을 정밀함이 고스란히 번역사의 몫이 되지만,  내용에서 의지할 만한 힌트를 찾아내기에 충분한 시간이 번역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내용이 유사하다는 전제 아래, 한국어에서 영어로 옮길 때 오역의 가능성이 그 반대보다 높아진다. 일본어나 중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이 필요할 때, 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원문이 영어로 작성되었다면 한국어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언어들로 동시에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로 원문이 작성되었다면 영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스페인어나 핀란드어로 옮겨야 한다. 이중 번역으로 인해 오역의 가능성은 높아지고 번역 기간도 두 배로 늘어난다.

번역사가 한국어 문서를 영어로 옮기는 것보다 테크니컬 라이터가 처음부터 영어로 작성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오역이 훨씬 더 적은 번역본들과 짧은 번역 기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하는 데에 현실적으로 장애가 전혀 없지 않다. 영어에 능한 테크니컬 라이터가 아직 많지 않으며, 많은 의뢰자들이 영어로 작성된 문서를 검토하는 것에 거북함을 느낀다. 그러나 당장의 이 장애와 불편을 감수하지 못하면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2017-05-31T10:16:37+00:00